jucklee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61] ~ [70] (2010. 5. 14 ~ 6. 24)

[61] J양은 콘서트에 가면 늘 눈을 감는다. 그 편이 집중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눈을 떴을 때, 그리던 것과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면 아득한 절망에 빠지고 말아요. 나에게 뮤지션의 표정이나 몸짓은 중요치 않아요. 그 마음의 풍경이 궁금할 뿐.”


[62]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을 확률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을 확률보다도 낮다는 얘기를 들은 R씨는 비행공포증을 떨치기는커녕 화장실공포증을 새로 얻게 되었다. 변보는 일이 하늘을 나는 일 만큼이나 무시무시해졌다.


[63]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소감. “소음을 감내해 주신 아파트 위, 아래, 옆집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랫집 할머니의 눈물. “그 놈이 바이엘 칠 때부터 들어왔지. 발전하는 게 들리면 짜증이 좀 누그러지곤 했어. 말도 마. 그 긴 세월을.”


[64] 흡연자들의 집집마다 잠자고 있는 엄청난 수의 라이터를 모아 비상시 군사용 연료로 사용하려던 군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거국적인 ‘라이터 모으기’ 행사 당일,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탄식했다. “아차, 또 두고 나왔네. 김 대리 불 있나?”


[65] 위대한 물수제비 챔피언 Y씨의 역사적 도전 당시 돌 위에 무당벌레 하나가 앉아 있었단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거침없이 던져진 돌은 수면을 차며 날쌔게 나아가 며칠 뒤 후쿠오카 해변에 도착했고 벌레는 그제야 아무 일 없다는 듯 날아올랐다.


[66] “샤워볼을 색과 모양, 기능별로 수백 개 갖고 있다는 게 왜 이혼사유가 됩니까?” M씨가 항변했다. “그날그날 날씨나 기분에 어울리는 최적의 샤워볼이 있다구요. 그 누구의 손길보다 큰 위안이 되는. 설마, 아내가 샤워볼을 질투한 건 아니겠죠?”


[67] 그녀의 보조개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쉽사리 열리지 않는. 문은 보통 흔적도 없이 닫혀 있었고, 가끔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 세계를 보기 위해 모든 걸 바쳤으나, 난 실패했다. 그녀는 열쇠를 가진 자를 찾아 떠났다.


[68] 불면증 환자 J의 말. “언제나 같은 꿈이야. 지루한 학회발표장. 졸음이 쏟아지지. 그때 단상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조롱해. 저기 자는 분이 있다고. 그때부터 난 졸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 그러니 말이야, 숙면을 취할 수가 있겠냐구.”


[69] “내가 보는 빨간색이 당신이 보는 빨간색과 같은 색이라고 믿을 근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느끼는 맛과 당신이 느끼는 맛이 같은 맛이라고 믿을 근거 역시 없지요. 난 맛만 있는데.” 손님의 불평에 주방장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70] “우리 몸에선 매일 세포들이 죽어나가고 그만큼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 1년쯤 지나면 몸 전체에 1년 전의 세포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지. 그래서 그런 거야. 몇 년 전 네가 저지른 일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건. 그땐 다른 사람이었다구.”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51] ~ [60] (2010. 4. 20 ~ 5. 11)

[51]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다니, 이 식당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흥분해 소리 지르는 손님을 향해 주인아주머니는 태연히 대꾸했다. “집에선 변기 옆에 칫솔을 두고 날마다 그걸로 입안을 쑤시면서 뭘 그러슈?”


[52] 숨이 차서, 멈춰서고 싶었다. 숨이 차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가 없던 것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것 때문에. 조금만 더 가면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평생을 약 올려온 그것 때문에.


[53] “노래를 부른다는 건, 친구를 부르거나 혼을 부르듯이 노래를 불러오는 거야. 찾아온 노래가 네 몸을 지나가게만 하면 돼.” “불러도 오지 않음 어떡해요?” “버럭 고함치면서 부르지 말고 편안하게 달래듯 불러 봐. 그럼 금세 온단다, 노래가.”


[54] 조명감독인 내가 무대를 암전시킬 때마다 그가 나타난다. 찰나지만 선명하다. 내 애인의 죽은 전남편이다. 그는 말한다. “걔가 날 죽였단 걸 알고 있어?” 그럴 리가. 사고였다고 들었다. 황급히 불을 밝히면 쇼는 계속된다. 아무렇지 않게 또.


jucklee RT @rhdgj @jucklee [55] 때론 나 자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워요. 누군가 적어주는 말을 그대로 읊고 있단 생각이 드는 거죠. 난 가공의 인물일지도 몰라요. 완전한 허구 말이에요. 그런 생각한 적 있나요? 절 팔로우해주시겠어요?


[56] 문자그대로氏는 유모차(乳母車)를 끌기 위해선 유모부터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전거(自轉車)는 스스로 굴러야 하거늘, 왜 사람이 페달을 밟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자그대로氏에게 세계는 균열 투성이였다. 문자 그대로.


[57] 궂은 날씨에 짓궂은 친구가 얄궂은 표정으로 심술궂게 소리 지른다. 소리 지르는 것은 마음에 불 지르는 것과 같아 사이를 가로질러 가슴을 찌르고, 저질러진 싸움에 나도 마구 내지르니 그 말이 친구 염장을 제대로 지른다. 아뿔싸, 말에 취했다.


[58] 누운 사람을 넘어 다니면 큰일 난다는 엄마의 말에, 새벽마다 소년은 좁은 방에 가득한 여덟 가족을 피해 벽에 붙어 일하러 나가야 했다. ‘그럼 큰 집에서 살든가.’ 심통이 나 막내의 배를 훌쩍 뛰어넘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후회는 늦었다.


[59] “피를 뚝뚝 흘리며 그 여자가 가게로 들어왔죠. 내가 무슨 일이냐고 비명을 지르자 그녀는 갑자기 왁 웃으며 품안에서 피 묻은 고기덩이를 꺼냈어요. 그 순간 살의가 솟구쳤죠. 그럴 수 밖에요. 대체 그녀는 왜 그랬을까요?” 피의자가 중얼거렸다.


[60] “날 기울여줘요. 다 쏟아내게, 그래서 다 비우게.” 바에서 만난 낯선 여인의 부탁을 남자는 당연히 유혹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잘못이었다. “구질구질한 걸 더 내 안에 우겨넣지 말라구. 난 완전히 빈 주머니가 될 거야. 애초에 그랬듯이.”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41] ~ [50] (2010. 3. 31 ~ 4. 16)

[41] 비유로서 존재하는 폭포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실재이고 싶었다. 엄청난 높이에서 어마어마한 물을 내동댕이치는 진짜 폭포. 하지만 아무도 실재하는 골짜기 따위엔 관심 없었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을 때에나 문득 거대한 폭포를 꿈꿨다.


[42] “난 네가 내 음악이 별로라고 해서 상처받은 게 아니야. 만드느라 이렇게 고생한 내게 내 음악이 별로라고 했을 때 상처받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잔인하게 얘기하는 너의 무신경함에 상처받았을 뿐이야!” 역시, 잠자코 있어야 했다.


[43]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우리의 관계에 철퇴와 같은 종지부를 찍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난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중언부언 떠들면서 판결의 순간을 미루었다. 급기야 그녀가 참지 못하고 소릴 질렀다. “너는 말이


[44] 140자 한계를 이용, 이별통보를 막아낸 남자는 그들이 트위터 안에 살고 있단 걸 감사히 여겼다. 고백은 간결했고 반성은 신속했다. 그녀가 긴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싸움은 중단됐다. 허나 불안이 사라지진 않았다. 뭔가 끓어 넘칠 것 같았다.


[45] “암표상이라고 아무 공연표나 막 사고파는 게 아니에요. 다 나름의 취향이 있습니다. 안 가는 공연도 많죠. 좋아하지 않는 공연의 암표를 팔다니 견딜 수가 없거든요. 웃돈을 주고서라도 볼 가치가 있다고 나부터 납득해야 남한테도 팔지 않겠어요?”


[46] “느낌표가 많으면 더 큰 소리로 들린다고? 그럴리가.” “왜!!!!!!!!!! 왜!!!!!!!!!!!!! 내 말을 못 믿어!!!!!!!!!!!!!!!!!!!!!!!!!!!!!!!” “아, 그만그만, 알았어.” “이 소리가 들렸어? 그럴리가.”


[47] 공터에 버려진 속 빈 피아노를 치러 오는 소녀를 위해 소년은 피아노 안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그리고 소녀가 낡아 덜그럭거리는 건반을 누를 때마다 노래를 불러주었다. 소녀가 깔깔거리자 소년도 웃음이 터졌다. 그게 둘의 최초의 합주였다.


[48] 자포자기한 악사가 길섶에 내던지고 간 기타는 슬그머니 흙을 파고 뿌리를 내렸다. 간밤에 이슬을 가득 담아두고 해가 뜨면 목을 뻗어 빛을 구했다. 기타나무가 자라나 녹슨 잎을 떨굴 즈음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가 들려왔다. 서러운 불협의 울음이.


[49] 아무 것도 없는 광장에 나무상자를 놓고 올라서면 무대다. 배우는 독백을 읊고 사람들은 지나친다. 문득 멈춰선 행인 둘. 그 곳이 바로 객석이다. 천막도 없는 극장에서 비로소 연극이 숨쉰다. 행인들이 떠나는 순간 덧없이 사라질 극장에서 힘차게.


[50] 운동이라곤 아침저녁으로 하는 칫솔질이 전부인 그가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단 사실은 도리어 주위 남자들을 안도케 했다. 타고난 것,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은 거슬리지 않는다. 애써서 되는 게 아니라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31] ~ [40] (2010. 3. 16 ~ 3. 29)

[31] “비밀인데, 도어스 음악이 왜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동호회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날 죽일지도 몰라.” “실은 나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뭐가 대단하단 건지 전혀 모르겠어. 우리 오늘 이 얘기는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다. 아바에 맹세해.”


[32]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C의 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엔 그 가방과 닮은 가방 하나만 빙빙 돌고 있었다. C는 조용히 그걸 들고 걸음을 옮긴다. 항공사에 물었다간 이마저 못 갖게 될 테니. 무엇이 들었을까, 가슴이 뛴다.


[33] “훨씬 더 큰 종이비행기가 필요해.”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방금 던진 종이비행기가 아직 날고 있었다. 내가 스케치북을 한 장 더 찢어 건네자 그는 씨익 웃었다. 그땐 몰랐다. 그가 뭘 계획하고 있었는지.


[34] 그가 매몰차게 일어서자, 그녀는 앉은 채 찻잔을 바라보다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기 시작했다. 잔속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칠어졌다. “다 사라져버려.” 그녀의 주문과 동시에 이 세상이 느릿느릿 잔으로 빨려 들어간다. 떠나려던 그도, 그녀도 모두.


[35] “회전문 안에 갇힌 새 얘기 들어봤어? 아무리 날아도 끝이 없으니 그 안이 무한한 세계라 믿었단 거야.” “멍청하긴.” “그러게 말이야.” 우리 둘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36] “뛰지 마!” 소리에 아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아이의 등에 흙이 쌓이고 그 위로 풀이 자란다. 넝쿨이 엉키고 들쥐가 집을 짓는다. 마음이 약해져 “이만 됐어!” 외치자 벌떡 일어선 녀석, 인사를 꾸벅 하더니 다시 내달린다. 기쁨에 달떠.


[37] “엄마, 세상에서 제일 긴 미끄럼틀 타 보고 싶어요.” “아주 먼 나라에 있는데 너무 높아 계단 오르는 데만 10년이 걸린대. 끝까지 오르면 온 세상이 한눈에 보이지만 이내 떠나야 한대. 내려오는 건 단 한 시간. 그래도, 타 보고 싶니?”


[38] 상투적인 것에 의지하는 박 과장이 귀가하면 아내가 찌른다. “일이야, 나야?” 딸에게 일과를 물으면 성낸다. “아빠가 들음 알아?” 베란다에서 노랠 흥얼거리면 날아오는 “거 잠 좀 잡시다!” 그는 안도한다. 오늘도 무사히 상투적인 하루였구나.


[39] 노배우가 말했다. “스타가 된다는 건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아. 본질은 같고 잠깐의 변화만 있는 거라구. 나중에 상온에 노출되어 얼음이 다시 물이 됐을 때 ‘아, 이 물은 예전에 얼음이었지.’ 라며 누가 알아줄 것 같나? 그저 물일뿐이지.”


[40] 출근길에, 걷는 법을 깜빡 잊었다. 몸의 균형이 도자기처럼 깨져 버렸다. 바닥에 쏟아져 내린 나를 한 아주머니가 발견하고는, 빗자루로 잘 쓸어 큰 비닐봉지에 담고 묻는다. “총각, 직장이 어디야?” 세상에, 살았다. 덕분에 지각을 면했다.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1] ~ [30] (2010. 2. 10 ~ 3. 15)

[1] “키스를 참 잘 하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그녀가 말했다. 무슨 뜻일까? 칭찬일까? 내가 ‘선수’란 뜻일까? 여지껏 얼마나 많이 해봤기에 금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걸까? 난 당황한 걸 감추려 우선 웃었다. “고마워. 보통이지 뭘.”


[2] 실수를 가장해 피카소의 그림 쪽으로 넘어지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내가 불멸에 다다를 유일한 방법이야.” 누구도 손 쓸 새 없이 그림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그녀는 3시간 가량 조사를 받은 뒤 미술관에서 풀려났다. 간절히 영원을 꿈꾸며.


[3] 운전할 때마다 김씨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자신과 충돌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1차선을 타면 숨이 가빠왔다. 어느 미친 놈, 또는 주정뱅이가 웃는 얼굴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달려들까봐. 바로 지금처럼.


[4] “여보세요? 난데, 회사 끝나고 와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4층 버튼이 없어졌어. 15층에 내려서 뛰어 내려가니 13층이고, 다시 올라가니 15층이잖아. 당신은 집에 있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5] ‘왜?’ 땅에 쓰러져 겨우 눈을 뜬 그는 생각했다. ‘왜?’ 10대 초반의 소년들이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흔드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왜?’ 목으로 쇠맛나는 더운 액체가 넘어갈 때 제일 큰 녀석이 다가왔다. ‘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6] 쇼핑몰에 들어서자 손님이 거의 없었다. 점원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미소지었다. 돌아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기에, 짐짓 웃음을 띄운 채 걷기 시작했다. 무엇을 사러 왔었더라. 그녀는 맹수우리에 던져진 사슴 같이 두리번거렸다.


[7] “바퀴벌레가요” “응?” “이렇게..이렇게 이렇게 하더니 이렇게 했어요.” “응” “그러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더니 휙 날아갔어요.” “아 그랬구나” “…” “…” “…” “뭐 먹을래?” “…” “이거?” “아니 저거” “응”


[8] 빽빽한 숲 한가운데서 엄마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너 혼자 가는 거야.” 사라지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선 채로 바지에 오줌을 쌌다. 어둠이 다가들자 아이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주저앉았다. 영영 아침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9] “그 무당이 뭐?” “지미 헨드릭스를 모신다니까.” “응?” “진짜, 록 음악이라곤 전혀 모르던 시골아낙이 갑자기 헨드릭스를 몸주로 모시더니 굿을 록으로 해.” “허, 그래 뭐라던?” “무대에서 언제 앰프를 불살라야 운이 트이는지 알려주더라.”


[10] “그 순간 맘을 접었지.” 아버지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말했다. “미친개가 우릴 좇아오던 날, 조금 앞서 달려가던 형이 고갤 돌려 날 보더니 눈에 광채를 띠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걸 본 순간. 절연의 순간은 뜻밖에 쉽게 찾아온단다.”


[11]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이미 뇌사 상태란 걸. 오래된 습관과 미련, 주저함과 비겁함에 기대 억지로 연명하고 있단 걸. 허나 우리 손으로 플러그를 뽑을 순 없었다. 그저 가녀린 숨이 스스로 끊어질 날을 기다릴 뿐. 무기력하게.


[12] 딱! 소리와 함께 중견수는 뛰기 시작했다. 숙련된 야수는 소리만 듣고도 낙구지점을 안다 했던가. 펜스까지 달려가 몸을 틀었을 때 그는 한참 앞 2루수 뒤로 맥없이 떨어지는 공을 보았다. 다음날 훈련을 빠진 그, 쓸쓸히 보청기를 맞추러 가는데.


[13] 읽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더 많은 책을 주문했다. 사방의 책장에 책을 꽂아 넣고 그 제목들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새 이야기를 위해서 책의 배열을 바꿨고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새 책을 주문했다. 그녀는 서재를 읽고 있었다. 그 방의 이야기를.


[14] 몹시도 추운 날, 끊이지 않는 한숨은 입김이 되고, 입김은 안개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모든 것이 얼어붙으려는 순간, 더운 한숨만이 그녀를 안아 겨우 숨 쉴 수 있게 했다. 절망이 구원이 되어버려, 한숨은 더 깊어지고, 삶은 또 이어지고.


[15] “음악은 사냥하고 달라. 저기 뛰어가는 멜로디를 발견하고 잡는 게 아냐. 병아리를 키우듯 공을 들여야 해. 다 자라면 멜로디를 낳지. 근데 그게 영원하지 않아.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되면 끝이야.” 왕년에 작곡가였다며 떡볶이아저씨가 말해줬다.


[16] 그는 늘 라디오를 켠 채 들고 다녔다. 이어폰 없이. 그에겐 선행을 베푸는 일과 같았다. 남들도 고요를 못 견딜 거라 믿었기에. 마침내 그가 살해당해 버려졌을 때, 라디오는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방치된 시신을 지켰다. 고요는 다시 유예되었다.


[17] “반포대교 위에서 그 여잘 봤어. 중앙선을 따라 걸으며 춤을 추고 있던. 내 차 옆거울이 그 여자 팔을 친 것 같아 뒤를 봤더니 전혀 개의치 않고 춤추고 있는 거야. 헌데 말이지. 차들이 좌우로 지날 때마다 그 여자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어.”


[18] “사과벌레가 사과 하나를 관통하는데 평생이 걸린다면, 사과벌레에겐 지옥 같을까. 천국 같을까.” 비가 오고 있었다. “사과벌레에게 세계는 사과와 사과 아닌 것으로 나뉠까. 아님 사과 이외의 것은 인식조차 되지 않을까.” 그의 잔이 또 비었다.


[19] 수도꼭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버텼다. 그는 몰랐다. 그 또한 먼저 떨어진 물방울 덕에 서서히 물방울로 자라났음을. 그가 떠난 뒤에 역시 그와 닮은 물방울 하나가 같은 자리에 자라날 것임을. 낙하의 순간이 다가온다.


[20] “완전한 어둠을 보고 싶어. 어설픈 것 말고.” 그녀를 위해 집안에 암실을 만들었다. 그녀를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비명이 들렸다. 문을 열자 땀에 젖은 그녀가 뛰어나와 소리쳤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어둠조차도.”


[21]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그는 완벽한 꿈의 베개를 찾는 원정에 돌입했다. 부드럽되 단단하고 푹신하되 탄력 있는 베개를 찾아 온 세상을 누볐다. 여정은 날로 혹독해졌고, 녹초가 된 그는 어느 날부턴가 머리가 땅에 닿기만 하면 곯아떨어지고 있었다.


[22] 새벽에 아이가 울며 뛰어왔다. “왜?” “사람들이 장난감을 끝도 없이 나한테 주는 꿈을 꿨어.” “좋은 꿈이네?” “장난감 상자가 너무 높고 커져서 내 야옹이 인형을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고 이내 잠이 든다.


[23] 부엌의 과도와 식칼, 공구함의 망치와 스패너, 상자 묶는 노끈, 난초가 자라는 화분, 심지어 20권짜리 백과사전까지. 집안에 가득한 물건들이 하나같이 흉기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 그녀는 이 결혼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단 걸 깨달았다.


[24] “그러고 보니 요즘 A양 TV에 통 안 보이네?” “소식 못 들었어?” “무슨 소식? 한달에 2~3kg씩 살 빼고 있다며 신나했었잖아?” “그게 2년이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지난달 완전히 소멸해버렸어.”


[25] “선생님,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는 게 너무 두려워요. 혼자서 하염없이 기다릴 것 같고, 사람들이 수군댈 것 같고, 지는 거 같고, 할 일 없다 무시당할 것 같아서요. 어쩌죠?” “전화 끊고, 일단 와서 얘기하시죠. 40분이나 늦으셨어요.”


[26] 노인이 매일 주워와 집안 가득 채운 것은 플라스틱병이었다. 마당에까지 산처럼 쌓인 PET병들은 뭘 위한 것이었을까. 그가 죽던 날 사람들은 병을 엮어 거대한 배를 만들고 그를 실었다. 영원히 썩지 않을 투명한 방주를 타고 그는 바다로 떠났다.


[27] 자꾸만 축구공이 두려워지는 축구선수 M은 교묘히 공을 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스루패스보다 한 발짝 앞서 달렸고 센터링에 스칠 듯 머리를 내밀었다. 이전보다 민첩해진 움직임 덕에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도 M은 늘 떨고 있었다.


[28] 소설가 W는 책을 읽어봐야 어차피 금세 잊는다는 걸 깨닫고 죽을 때까지 단 한권의 책만을 반복해서 읽기로 했다. 훗날 마침내 완전히 암기하게 된 그 책은 ‘배관설비의 기초-하권’이었고, W는 그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스물일곱편의 장편을 써냈다.


[29] 목 놓아 외쳐도 소리는 강 저편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을 써 그에게 뜻을 전해야 했다. 팔을 벌리고 몸을 젖히고 다리를 높이 차며 메시지를 띄웠다. “우린 이제 끝난 것 같아.” 강 건너 그는 활짝 웃으며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30] “인생을 준비하는 자세란 말이야,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오는 모임이 있는 날 아무 일 없을 줄 알면서도 가장 괜찮은 팬티를 챙겨 입는 것과 비슷해. 남의 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스스로의 자신감이 우선이라고.”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