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1] ~ [30] (2010. 2. 10 ~ 3. 15)
[1] “키스를 참 잘 하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그녀가 말했다. 무슨 뜻일까? 칭찬일까? 내가 ‘선수’란 뜻일까? 여지껏 얼마나 많이 해봤기에 금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걸까? 난 당황한 걸 감추려 우선 웃었다. “고마워. 보통이지 뭘.”
[2] 실수를 가장해 피카소의 그림 쪽으로 넘어지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내가 불멸에 다다를 유일한 방법이야.” 누구도 손 쓸 새 없이 그림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그녀는 3시간 가량 조사를 받은 뒤 미술관에서 풀려났다. 간절히 영원을 꿈꾸며.
[3] 운전할 때마다 김씨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자신과 충돌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1차선을 타면 숨이 가빠왔다. 어느 미친 놈, 또는 주정뱅이가 웃는 얼굴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달려들까봐. 바로 지금처럼.
[4] “여보세요? 난데, 회사 끝나고 와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4층 버튼이 없어졌어. 15층에 내려서 뛰어 내려가니 13층이고, 다시 올라가니 15층이잖아. 당신은 집에 있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5] ‘왜?’ 땅에 쓰러져 겨우 눈을 뜬 그는 생각했다. ‘왜?’ 10대 초반의 소년들이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흔드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왜?’ 목으로 쇠맛나는 더운 액체가 넘어갈 때 제일 큰 녀석이 다가왔다. ‘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6] 쇼핑몰에 들어서자 손님이 거의 없었다. 점원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미소지었다. 돌아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기에, 짐짓 웃음을 띄운 채 걷기 시작했다. 무엇을 사러 왔었더라. 그녀는 맹수우리에 던져진 사슴 같이 두리번거렸다.
[7] “바퀴벌레가요” “응?” “이렇게..이렇게 이렇게 하더니 이렇게 했어요.” “응” “그러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더니 휙 날아갔어요.” “아 그랬구나” “…” “…” “…” “뭐 먹을래?” “…” “이거?” “아니 저거” “응”
[8] 빽빽한 숲 한가운데서 엄마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너 혼자 가는 거야.” 사라지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선 채로 바지에 오줌을 쌌다. 어둠이 다가들자 아이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주저앉았다. 영영 아침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9] “그 무당이 뭐?” “지미 헨드릭스를 모신다니까.” “응?” “진짜, 록 음악이라곤 전혀 모르던 시골아낙이 갑자기 헨드릭스를 몸주로 모시더니 굿을 록으로 해.” “허, 그래 뭐라던?” “무대에서 언제 앰프를 불살라야 운이 트이는지 알려주더라.”
[10] “그 순간 맘을 접었지.” 아버지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말했다. “미친개가 우릴 좇아오던 날, 조금 앞서 달려가던 형이 고갤 돌려 날 보더니 눈에 광채를 띠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걸 본 순간. 절연의 순간은 뜻밖에 쉽게 찾아온단다.”
[11]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이미 뇌사 상태란 걸. 오래된 습관과 미련, 주저함과 비겁함에 기대 억지로 연명하고 있단 걸. 허나 우리 손으로 플러그를 뽑을 순 없었다. 그저 가녀린 숨이 스스로 끊어질 날을 기다릴 뿐. 무기력하게.
[12] 딱! 소리와 함께 중견수는 뛰기 시작했다. 숙련된 야수는 소리만 듣고도 낙구지점을 안다 했던가. 펜스까지 달려가 몸을 틀었을 때 그는 한참 앞 2루수 뒤로 맥없이 떨어지는 공을 보았다. 다음날 훈련을 빠진 그, 쓸쓸히 보청기를 맞추러 가는데.
[13] 읽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더 많은 책을 주문했다. 사방의 책장에 책을 꽂아 넣고 그 제목들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새 이야기를 위해서 책의 배열을 바꿨고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새 책을 주문했다. 그녀는 서재를 읽고 있었다. 그 방의 이야기를.
[14] 몹시도 추운 날, 끊이지 않는 한숨은 입김이 되고, 입김은 안개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모든 것이 얼어붙으려는 순간, 더운 한숨만이 그녀를 안아 겨우 숨 쉴 수 있게 했다. 절망이 구원이 되어버려, 한숨은 더 깊어지고, 삶은 또 이어지고.
[15] “음악은 사냥하고 달라. 저기 뛰어가는 멜로디를 발견하고 잡는 게 아냐. 병아리를 키우듯 공을 들여야 해. 다 자라면 멜로디를 낳지. 근데 그게 영원하지 않아.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되면 끝이야.” 왕년에 작곡가였다며 떡볶이아저씨가 말해줬다.
[16] 그는 늘 라디오를 켠 채 들고 다녔다. 이어폰 없이. 그에겐 선행을 베푸는 일과 같았다. 남들도 고요를 못 견딜 거라 믿었기에. 마침내 그가 살해당해 버려졌을 때, 라디오는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방치된 시신을 지켰다. 고요는 다시 유예되었다.
[17] “반포대교 위에서 그 여잘 봤어. 중앙선을 따라 걸으며 춤을 추고 있던. 내 차 옆거울이 그 여자 팔을 친 것 같아 뒤를 봤더니 전혀 개의치 않고 춤추고 있는 거야. 헌데 말이지. 차들이 좌우로 지날 때마다 그 여자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어.”
[18] “사과벌레가 사과 하나를 관통하는데 평생이 걸린다면, 사과벌레에겐 지옥 같을까. 천국 같을까.” 비가 오고 있었다. “사과벌레에게 세계는 사과와 사과 아닌 것으로 나뉠까. 아님 사과 이외의 것은 인식조차 되지 않을까.” 그의 잔이 또 비었다.
[19] 수도꼭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버텼다. 그는 몰랐다. 그 또한 먼저 떨어진 물방울 덕에 서서히 물방울로 자라났음을. 그가 떠난 뒤에 역시 그와 닮은 물방울 하나가 같은 자리에 자라날 것임을. 낙하의 순간이 다가온다.
[20] “완전한 어둠을 보고 싶어. 어설픈 것 말고.” 그녀를 위해 집안에 암실을 만들었다. 그녀를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비명이 들렸다. 문을 열자 땀에 젖은 그녀가 뛰어나와 소리쳤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어둠조차도.”
[21]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그는 완벽한 꿈의 베개를 찾는 원정에 돌입했다. 부드럽되 단단하고 푹신하되 탄력 있는 베개를 찾아 온 세상을 누볐다. 여정은 날로 혹독해졌고, 녹초가 된 그는 어느 날부턴가 머리가 땅에 닿기만 하면 곯아떨어지고 있었다.
[22] 새벽에 아이가 울며 뛰어왔다. “왜?” “사람들이 장난감을 끝도 없이 나한테 주는 꿈을 꿨어.” “좋은 꿈이네?” “장난감 상자가 너무 높고 커져서 내 야옹이 인형을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고 이내 잠이 든다.
[23] 부엌의 과도와 식칼, 공구함의 망치와 스패너, 상자 묶는 노끈, 난초가 자라는 화분, 심지어 20권짜리 백과사전까지. 집안에 가득한 물건들이 하나같이 흉기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 그녀는 이 결혼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단 걸 깨달았다.
[24] “그러고 보니 요즘 A양 TV에 통 안 보이네?” “소식 못 들었어?” “무슨 소식? 한달에 2~3kg씩 살 빼고 있다며 신나했었잖아?” “그게 2년이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지난달 완전히 소멸해버렸어.”
[25] “선생님,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는 게 너무 두려워요. 혼자서 하염없이 기다릴 것 같고, 사람들이 수군댈 것 같고, 지는 거 같고, 할 일 없다 무시당할 것 같아서요. 어쩌죠?” “전화 끊고, 일단 와서 얘기하시죠. 40분이나 늦으셨어요.”
[26] 노인이 매일 주워와 집안 가득 채운 것은 플라스틱병이었다. 마당에까지 산처럼 쌓인 PET병들은 뭘 위한 것이었을까. 그가 죽던 날 사람들은 병을 엮어 거대한 배를 만들고 그를 실었다. 영원히 썩지 않을 투명한 방주를 타고 그는 바다로 떠났다.
[27] 자꾸만 축구공이 두려워지는 축구선수 M은 교묘히 공을 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스루패스보다 한 발짝 앞서 달렸고 센터링에 스칠 듯 머리를 내밀었다. 이전보다 민첩해진 움직임 덕에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도 M은 늘 떨고 있었다.
[28] 소설가 W는 책을 읽어봐야 어차피 금세 잊는다는 걸 깨닫고 죽을 때까지 단 한권의 책만을 반복해서 읽기로 했다. 훗날 마침내 완전히 암기하게 된 그 책은 ‘배관설비의 기초-하권’이었고, W는 그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스물일곱편의 장편을 써냈다.
[29] 목 놓아 외쳐도 소리는 강 저편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을 써 그에게 뜻을 전해야 했다. 팔을 벌리고 몸을 젖히고 다리를 높이 차며 메시지를 띄웠다. “우린 이제 끝난 것 같아.” 강 건너 그는 활짝 웃으며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30] “인생을 준비하는 자세란 말이야,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오는 모임이 있는 날 아무 일 없을 줄 알면서도 가장 괜찮은 팬티를 챙겨 입는 것과 비슷해. 남의 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스스로의 자신감이 우선이라고.”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